조조에게 이혼 당한 조강지처 정부인

홍성남 작가

삼국지에는 많은 영웅들이 등장한다. 대부분 남자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구의 절반은 여자인데 왜 여자들의 이야기는 없는가. 100년 동안의 삼국시대에는 수백, 수천 또는 수십만명이 전쟁으로 죽었다. 백성들의 피폐한 삶은 인육을 먹어야 할 정도였다. 그 속에서도 여자들은 아이를 낳고 길렀다. 그 아이들은 전쟁터에서 영웅의 깃발을 놓고 한판승부를 벌였다. 여자들은 영웅을 낳고 영웅은 여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시대였다.

삼국지가 남자 영웅들의 기록이지만 진정한 영웅은 여자들이다.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전쟁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보급하지 않았다면 삼국지의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자의 수는 불과 10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는 무력이 중요한 지배수단이었다. 하지만 드러난 무력 뒤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역사가와 이야기꾼들은 그 힘을 보지 못했고 기록하지도 않았다. 그 결과 삼국지에서 여자들에 대한 기록은 전무 하거나 거의 없다. 정사에서는 불과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당시 여자들의 존재와 가치는 매우 미약했다. 일종의 전리품으로 취급받았다.

영웅의 탄생 과정에서 여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여자에 대한 인식과 위상은 2135년전 삼국시대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의 단계를 넘어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상황으로 변해 있다.

삼국지의 사료들을 보면 여자들의 흔적을 희미하게 찾아 볼 수 있다. 정사에서는 영웅들의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영웅들의 일대기를 훑어보면 그 주변에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인연을 맺은 여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따라 영웅의 길은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양상은 여성상위 시대와 모계사회로 표현된다. 삼식이 유머가 남성들의 사회적 좌표를 우회적으로 꼬집기도 한다. 현재도 리더들 주변에 어떤 여자들이 포진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영웅의 길을 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삼국지 여자들의 이야기는 남성 중심의 족보가 아닌 여성 족보적인 관점에서 기술했다. 여성 편력이 왕성 했던 조조도 무선황후에게는 한 남자에 불과했다. 글은 위·촉·오나라 순서로 싣는다.

여자와 자식 복 많았던 조조
조위曹魏의 조조 곁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2명의 정실부인과 무려 13명의 첩이 조조와 남녀의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눴다. 이중 7~8명의 여자가 남의 부인 이었다. 주로 전쟁에서 이겨 적장의 부인을 자기 첩으로 삼았다. 이를 두고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주유에게 조조가 주유의 부인 소교를 취하려 한다는 말로 주유의 화를 돋궈 오촉동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조조의 성적 취향은 처녀보다는 결혼한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의 그런 성향은 적군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던 시대적 상황에서 정복욕을 즐기는 경향이었다. 아무튼 조조의 여성관과 성적 취향은 삼국의 다른 군주에 비해 좀 특이 했다.

위나라 후궁의 등급은 13등급 이었다. 1등급은 부인夫人, 2등급 귀빈貴嬪, 3등급 숙비淑妃, 4등급 숙원淑媛, 5등급 소의昭儀, 6등급 소화昭華, 7등급 수용修容, 8등급 수의修儀, 9등급 첩여婕妤, 10등급 용화容華, 11등급 미인美人, 12등급 양인良人이고 13등급은 차인鹾人 이다.

위나라의 전 왕조인 한나라의 후궁제도는 고제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건국한 전한과 기원후 25년에 광무제 유수가 건국한 후한으로 구별한다. 전한은 서한, 후한은 동한으로 칭하기도 한다.

전한을 건국한 유방은 황후 1인을 두는 주나라의 제도를 답습하였다. 후궁의 작호와 위계는 달리 정하지 않았다. 전국시대 열국 제왕의 처첩을 상징하는 호칭인 부인夫人, 미인美人, 희姬를 썼다.

전한의 7대 황제인 한무제 때에 이르러 황후 아래 여관직(후궁+시녀)인 첩여婕妤, 형아娙娥, 용화傛華, 충의充依가 증설되었고, 한 원제 때 소의昭儀가 추가되어 황후의 아래에 놓였다. 이후 전한의 후비 제도는 황후 1인 아래 빈이 14등급으로 나뉘어졌다.

1등급 소의昭儀, 2등급 첩여婕妤, 3등급 형아娙娥, 4등급 소화傛華, 5등급 미인美人, 6등급 팔자八子, 7등급 충의充依, 8등급 칠자七子, 9등급 양인良人, 10등급 장사長使, 11등급 소사少使, 12등급 오관五官, 13등급 순상順常, 14등급 공화共和·오령娛靈·보림保林·양사良使 등 이다.

황태자의 처는 비妃로 삼았으며 첩은 양제良娣와 유자孺子로 삼았다. 황손의 처는 부인으로 삼았고 첩에겐 정식 작호가 없었다.

후한에서는 전한 때의 제도를 답습하되 14등급으로 세분했던 후궁의 작위를 대폭 축소하여 4등급으로 나누었다. 이에 귀인貴人, 미인美人, 궁인宮人, 채녀采女만 존재했다.
많은 여자를 부인과 첩으로 거느렸던 조조는 후궁제도를 전한 것을 본 받아 여러 직급을 두어 내명부를 관리했다.

조조는 모두 34명의 자식을 두었다. 이중 딸은 8명 이었다. 조절曹節과 조헌曹憲, 조화曹華, 청하공주淸河公主, 안양공주安陽公主, 금향공주金鄕公主, 임분공주臨汾公主, 고성공주高城公主가 있었다. 이중 다수는 생모가 누구인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기록에 포함 되지 않는 아들 딸 들을 포함하면 조조의 자식들은 더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213년 건안 7년 조조는 어린 딸 셋을 헌제에게 후궁으로 바치기도 했다. 조절曹節과 조헌曹憲, 조헌曹憲 이다. 214년에 셋은 모두 귀인이 되었다가 2명은 황후가 되고 1명은 귀인이 되었다. 조절은 헌목황후獻穆皇后가 되고 조헌은 헌효황후獻孝皇后가 되었으며 조화는 귀인으로 남았다. 당시 이들은 나이가 어려 위국에서 성장하길 기다려 궁에 입성하여 헌제의 잠자리에 들었다.

한漢나라의 제도에는 황제의 조모를 태황태후太皇太后라 하였고, 황제의 모친을 황태후皇太后라고 하였으며, 황제의 정비正妃를 황후皇后라고 하였고, 기타 내관의 비빈妃嬪을 14등급으로 나누었다.

위나라는 한나라의 법제를 답습하였기 때문에 황태후의 칭호는 옛날 제도와 모두 같았다. 그러나 부인 이하의 비에 관해서는 시대에 따라 더하고 덜함이 있었다. 조조가 나라를 세워 처음으로 왕후王后를 정한 경우에는 그 아래에 부인夫人, 소의昭儀, 첩여捷伃, 용화容華, 미인美人 등 5등급이 있었다.

문제 조비는 이 5등급에 귀빈貴賓, 숙원淑媛, 수용脩容, 순성順成, 양인良人을 더하였다. 명제또한 여기에 숙비淑妃, 소화昭華, 수의脩儀를 더하고 순성順成이라는 관위官位를 빼버렸다. 227년 태화 연간에는 처음으로 부인의 명칭을 회복시키고 그 서열을 숙비보다 높은 위치로 올리도록 명하였다. 부인 이하의 작위를 모두 12등급으로 했다. 귀빈과 부인을 황후 다음에 두었다. 하지만 그에 상당하는 작위는 없었다.

숙비의 관위는 상국에 상당하고 작위는 제후왕에 대비되었다. 숙원의 관위는 어사대부에 상당하며 작위는 현공縣公에 대비되었다. 소희는 현후에 비견되었고, 소화는 향후에 대비되었으며, 수용은 정후에 대비되었고, 수의는 관내후에 대비되었으며, 첩여는 중이천석中二千石에 상당하였고, 용화는 진이천석眞二千石에 상당하였으며, 미인은 비이천석比二千石에 상당하고, 양인은 천석千石에 대비되었다.

조조의 부인과 첩과 아들과 딸

직급 호칭 자녀
부인 정부인丁夫人 없음
부인 무선황후 변씨
武宣皇后 卞氏
1남: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187년 - 226년)
2남: 임성왕任城王 조창曹彰(?-223년)
3남: 진왕陳王 조식曹植192년-232년)
4남: 조웅曹熊(?-220년)-조졸
1녀:헌목황후獻穆皇后 조절曹節-한 헌제 황후
2녀:조화曹華-한 헌제 귀인
유부인
劉夫人
1남: 도왕悼王 조앙曹昂)(?-197년)
2남: 상왕殤王 조삭曹鑠-조졸
1녀: 청하공주清河公主-하가下嫁 하후무夏侯楙
환부인
環夫人
1남: 조충曹沖)(195년-207년)-조졸
2남: 팽성왕彭城王 조거曹據
3남: 연왕燕王 조우曹宇(?-278년)
두부인
杜夫人
1남: 패왕沛王 조림曹林(?-256년)
2남: 중산왕中山王 조곤曹袞)(?-235년)
1녀: 금향공주金鄉公主-하가下嫁 하안何晏
진부인
秦夫人
1남: 서향후西鄉侯 조현曹玹
2남: 진류왕 陳留王 조준曹峻(?-259년)
윤부인
尹夫人
1남: 조구曹矩-조졸
소의 왕씨
昭儀 王氏
없음
손희孫姬 1남: 조상曹上-조졸
2남: 초왕楚王 조표 曹彪(195년-251년)
3남: 조근曹勤-조졸
이희李姬 1남: 조승曹乘-조졸
2남: 미후郿侯 조정曹整(?-218년)
3남: 조경曹京-조졸
주희周姬 1남: 번후樊侯 조균曹均(?-219년)
유희劉姬 1남: 조극曹棘-조졸
송희宋姬 1남: 동평왕東平王 조휘曹徽(?-241년)
조희趙姬 1남: 곡양왕曲陽王 조무曹茂
진씨陳氏 1남: 조왕趙王 조간曹幹-생모가 죽은 후 왕부인 양육
  생모미상 딸:헌효황후獻孝皇后 조헌曹憲-한 헌제 귀인
딸:안양공주安陽公主-하가下嫁 순운荀惲
딸:고성공주高城公主
딸:임분공주臨汾公主


조조에게 이혼 당한 조강지처 정부인
정부인丁夫人은 조조의 첫 번째 부인으로 조강지처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정부인은 자식을 얻기 위해 유씨를 조조의 첩으로 들였다. 유씨는 정부인의 시녀 이었다. 정부인의 바람대로 유씨는 아들 조앙曹昻을 쑥 낳아 주었다. 하지만 유씨는 아들을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복이 박명한 여인 이었다.

정씨는 조앙을 친자식처럼 애틋하게 온갖 정성을 다해 길렀다. 성장한 조앙은 장남으로서 약관의 나이에 효렴(효행이 지극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을 군의 태수가 조정에 관리후보로 추천하는 제도)으로 천거되어 조조를 따라 전쟁터에 나서곤 했다. 그런데 한 전투에서 어이없게 죽었다. 정부인은 조앙이 죽은 뒤 조조와 이혼했다.

조앙의 죽음은 아버지 조조를 살린 죽음 이었다.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죽은 것은 칭송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정부인은 조앙의 죽음으로 인해 조조를 극도로 멸시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부인은 조앙의 죽음이 조조의 지나친 여색에서 비롯되었다고 봤다. 조조가 장제의 미망인을 취하자 조카인 장수가 습격했고, 이 과정에서 조앙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싸움터에서 조조가 남의 여자를 취한 일로 야습을 받아 천금 같던 자식이 죽었기 때문에 아비가 자식을 죽인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조앙은 자신의 말을 조조에게 건네고 자신은 탈 말이 없어서 장수의 군사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196년 조조는 형주 완성宛城 전투에서 장수로부터 뜻하지 않게 항복을 받는다. 장수는 책사 가후賈詡의 의견에 따라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또한 조조를 위해 매일 잔치를 열어 대접했다. 그런 와중에 조조는 한 미녀를 취했다. 절세의 미인으로 알려진 장제의 후처였던 미망인 추씨鄒氏 이었다. 강제로 조조와 밤을 보내게 된 추씨는 그 이후 조조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장수는 분노와 치욕을 느꼈다. 장수에게 장제의 후처 추씨는 남이 아닌 숙모 이었다.

장수는 참모인 가후의 책략에 따라 완성에서 조조의 영채를 야습했다. 조조는 습격을 피해 간신히 도망쳤다. 그러나 장남 조앙曹昂과 조카 조안민曹安民, 친위대장 전위典韋 등 다수의 병사를 잃었다.

장수張繡(?-207년)는 중국 후한 말의 무장이자 군벌로서 양주凉州 무위군武威郡 조려현祖厲縣 사람이다. 말을 잘 탔으며 무예가 출중한 무인 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현의 관리 유준劉雋에게 발탁되어 그를 섬겼다. 그런데 얼마 뒤 한수韓遂, 변장邊章에게 호응한 국승麴勝이 모반을 일으켜 유준을 살해하자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국승을 공격했다.

그는 국승을 죽여 원수를 갚았고, 그 일로 인하여 무명을 떨쳤다. 연이어 한수와 변장 등 양주涼州의 군대를 격퇴했다. 그로 인해 동탁董卓에게 인정을 받아 그를 섬기게 되었다. 동탁이 죽은 뒤에는 부친의 막내 동생으로 숙부인 장제를 따랐다.

196년 장제는 군사를 이끌고 형주의 양성穰城을 공격하던 도중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수가 그의 뒤를 이었다. 유표劉表는 장제의 뒤를 이은 조카 장수와 그 부하들을 받아들이고 장선을 죽인 보답으로 완성宛城에 주둔하게 하였다.

장선張宣(?-198년)은 중국 후한 말의 정치가이다. 198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칭제하여 국호을 후신으로 하고 완성宛城을 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장제의 조카인 장수에게 토벌 당한다. 장선은 전세가 불리해져 남문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장수가 쏜 활을 머리에 맞고 낙마해 죽었다.

이후 장수는 유표와 손을 잡고 완성에서 조조에게 대항했다. 그러나 조조군의 군세에 압도당해 항복했다.

장수는 완성의 야습 이후에도 유표와 더불어 조조와 싸웠다. 그러나 참모인 가후의 조언에 따라 조조에게 귀순했다. 원소袁紹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두 사람은 장수와 가후를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각각 사람을 보내왔다. 이때 가후는 “원소는 형제 원술 조차 신뢰하지 않고 세력도 강력해서 우리를 경시하고 중용하지 않겠지만 조조는 천자天子를 받들고 세력이 열세이므로 자기편이 늘어나기를 원하므로 과거의 사사로운 원한은 문제 삼지 않고 우리를 틀림없이 중용하리라.”라고 장수에게 진언했다.

귀순 후에는 조조가 원소를 치러 갈 때 종군했다. 그런데 198년 장선을 죽인 일로 그 종제인 장료한테 죽임을 당한다.

장수의 장남 장천은 후한의 장락위위長樂衛尉 이었다. 그러나 219년 친분이 있던 위풍魏諷과 함께 위나라 전복을 목표로 쿠데타를 모의하다 실패하고, 조비에 의해 그의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이로써 장수의 혈통은 끊어졌다.

조조는 시인으로서 정情이 많은 인물 이었다. 그의 여성편력은 대단했다. 여러 부인과 첩을 두었다. 그 중 조강지처 이었던 정부인에 대한 연민은 조조의 다른 면을 보게 된다.

장수의 야습에서 목숨을 건진 조조는 허도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큰아들 조앙을 잃은 애통함이 순간 크게 밀려 왔다. 죽을 고비에서 살아 돌아온 조조에 대한 정부인의 반응은 싸늘했다. 조앙이 죽은 이유가 조조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의 따뜻한 위로를 기대한 조조는 서운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장자인 조앙이 죽었기 때문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정부인은 등을 돌린 채 눈길도 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조조는 말없이 정부인의 눈치만 살폈다. 어쩌다 말이라도 붙이면 그녀는 조조의 가슴을 후비는 말만 퍼 부었다.

애비가 자식을 위해 죽는 것이 세상사 인데 그래 자식을 애비 대신 죽게 해야 했단 말인가라는 정부인의 말에 조조의 마음도 이루 말 할 수 없이 참담 했다.

정부인은 말을 마치자 통곡하기 시작 했다. 슬며시 방을 나온 조조는 힘없는 발길로 집 주위를 돌았다.

조조는 정부인이 섭섭하다 못해 야속했다. 죽을 사지를 빠져 나왔는데 위로는 못할망정 속만 긁어댄다는 마음이 들었다.

정부인은 조조의 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참다못한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쫓아 버렸다. 정부인의 분노를 꺾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고향집으로 쫓겨가는 정부인의 가슴에는 조조에 다한 분노의 감정이 깊게 자리 잡았다. 조조는 여러 부인과 첩이 있으니 정부인이 없어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강지처 정부인의 빈자리는 매우 컸다. 큰 아들 조앙이 없는 자리까지 겹쳐 허전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이때 첩인 변씨는 조조의 심사를 알아채고 조조에게 정부인을 데려 오라고 말했다. 조조도 옛정을 생각하며 처가인 정부인의 집으로 갔다.

정부인은 친정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실의에 빠진 핏기 없는 얼굴 이었다.

조조가 오는 것을 본 처가 식구들이 정부인에게 달려갔다. 그런데 정부인은 부부의 정이 그리워 찾아 온 조조를 반기지 않았다. 조조를 쳐다보지도 않고 베짜는 일만 계속 했다. 조조는 정부인이 민망하여 그런 줄 알고 베짜는 정부인 등 뒤에서 한참을 서 있다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부인, 미안 하오. 이제 그만 우리 같이 집으로 갑시다.”
그러나 정부인은 조조의 사정에도 불구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베만 짜고 있었다. 조조는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한참을 생각하다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조는 다시 한 번 정부인을 향해 말했다.
“부인 날 용서하고 함께 집에 갑시다.”
정부인의 태도는 여전했다. 고개도 돌려보지 않은 채 베만 짰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 조조는 첩인 변卞씨를 정부인貞夫人으로 삼고 정부인 집으로는 사람을 보내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개가改嫁시키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정부인 집에서는 감히 개가시키지 못했다.

삼국지 무선변황후전(其後丁亡기후정망, 后請太祖殯葬후청태조빈장, 許之허지, 乃葬許城南급장허성남 註:위략)에 따르면 정씨가 죽자 변 황후는 조조에게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받아 허도 남쪽에 매장했다.

또한 훗날 조조는 병이 들어 누워 있으면서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을 알고 한탄하며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수많은 행동을 해왔지만,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죽어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내 아들 조앙이 나에게 ‘내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後太祖病困후태조병곤, 自慮不起자려불기, 歎曰탄왈:我前後行意아전후행의, 於心未曾有所負也여심미증유소부야。假令死而有靈가령사이유령, 子脩若問자수약문 我母所在아모소재, 我將何辭以아장하사이。)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쫓아낸 지 23년이 지난 나이 예순 여섯에 영웅으로서 운명을 맞아 죽는다.(다음 2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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