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인의 바람대로 2남1녀 낳아

홍성남 칼럼니스트

씨받이에서 첩이 되었지만 단명한 유부인
 
유부인劉夫人(?~?)은 조조의 수많은 첩 중의 한명이다. 그녀는 처음에 정부인의 시녀이었다. 자식이 없던 정부인은 자식을 얻기 위해 시녀인 유씨를 조조의 첩으로 들였다. 유부인은 정부인의 바람대로 2남1녀를 낳았다.

그러나 그녀는 수명이 짧아 일찍 죽었다. 유부인의 자녀들은 모두 정실부인인 정부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남 풍민왕 조앙曹昂(?~197년)과 일찍 죽은 2남 상상왕相殤王 조삭曹鑠 그리고 딸 청하공주清河公主가 그들 이었다. 청하공주는 하가下嫁 하후무夏侯楙에게 시집 갔다.

조앙은 조조의 장남으로 자는 자수子脩이며 시호는 풍민왕豊愍王이다. 측실인 유부인 소생으로 서장자 이었으나 유부인이 일찍 죽자 동복 아우 조삭과 여동생 청하공주와 함께 조조의 정부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조조의 적장자가 되었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197년 건안 2년 조조는 장수를 공격하여 장수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여색을 밝혔던 조조가 장제의 아내를 범하자 조카인 장수가 조조에게 원한을 품었다. 사전에 이를 감지한 조조가 장수를 죽이려 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누설되었다. 장수가 먼저 조조를 공격 했다. 조조는 패하여 달아났다. 이때 조앙은 자신의 말을 조조에게 내어 주었다. 말이 없어 도망갈 수 없었던 조앙은 장수의 군사들에게 죽음을 당했다.

조앙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복 동생 조비가 황제가 된 후인 221년 황초 2년에 풍도공豊悼公으로 추존 되었다. 이듬해 황초 3년에는 번안공 조균의 아들 조완으로 풍도왕의 후사를 삼아 중도공中都公에 봉했다. 224년 황초 5년에 풍도공의 작위를 올려 풍도왕豊悼王이라 했다. 229년 태화 3년에는 시호를 민왕愍王으로 고쳤다.

가평嘉平 6년 조균이 조앙의 작위를 습작해 풍왕豐王이 됐다. 정원正元(4대 조모), 경원景元(5대 조환) 중 여러 번 식읍을 더하여 전 것과 합해 2700호가 됐다. 조균이 죽은 뒤는 시호를 공왕恭王이라고 했다. 자식 조렴曹廉이 대를 이었다.

조비는 즉위하고서 항상 “내 형은 효렴으로서 제 분수를 지켰다. 만일 창서가 살아 있었으면 나는 천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정부인은 조앙이 죽은 후 항상 “내 아들을 죽이고 다시 생각하지도 않는구나.”라며 지나칠 정도로 울었고 화가 난 조조가 정부인을 본가로 쫓아 보냈다. 이후 조조는 다시 정부인을 부르고자 했으나 정부인이 끝내 응하지 않아 둘 사이의 혼인은 깨졌다.

상상왕 조삭은 어려서 죽었다. 229년 태화 3년에 시호가 추증됐다. 233년 청룡(2대 조예) 원년에 아들 민왕 조잠曹潛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회왕 조언曹偃이 왕위를 계승하고 식읍은 2500호였다. 조언이 236년 청룡 4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봉국은 취소되었다. 255년 정원(3대 조모) 2년에 악릉왕 조무의 아들인 양도향공 조송으로 조삭의 뒤를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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